오늘 입고 간 바지가 좀 질질 끌리는 소위 반 골반의 힙합스타일이었습니다. 어제 눈이 와서 길은 진창이고, 덕분에 바지자락이 좀 많이 지저분해졌죠.
그걸 본 선배 한명이, "바지 자락 잘라줄까?" 라고 하길래 "이게 전에는 이렇게까지 끌리지 않았는데 요즘에 뱃살이 빠져서 바지가 막 내려와요" 라고 했습니다. 그리고 순간 분노에 찬 다른 분들의 얼굴과 마주쳐야 했죠. 야, 그래도 오군, 그렇게까지 얼굴 시뻘개질 것까지는 없잖아. 사실인데. (ㅌㅌㅌ)
보통 여름에는 입맛이 없어서 3~4 kg씩은 예사로 빠집니다. 한번 입맛을 잃으면 일주일동안 우유와 꿀, 각종 냉차만 먹으니까 당연하죠. 그리고 그렇게 빠진 체중은 겨울에 약 1.5배가 되어 돌아옵니다. 그런데 이번 겨울은 좀 특이해요. 아직 12월밖에 안되기는 했지만 체중이 줄기 시작하고 있어요. 물론 운동을 해서 건강하게 빠지는 게 아니라 안 먹어서 빠지는 거니 조만간 요요현상이 생기겠지만, 아무래도 예년과는 상태가 좀 다르네요.
저 먹는 거 굉장히 좋아합니다. 그래서 입맛은 현재 몸상태의 바로미터나 마찬가지입니다. 한여름에는 태양을 향해 저주를 퍼붓고 싶어질 정도로 더위에 약한지라 몸이 힘들어서 음식을 못 넘겨요. 긴장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불면증과 더블어택으로 오는 게 바로 식욕상실이죠. 그래요, 저 요즘 녹초가 되서 죽을 거 같아요. 다만 이번에는 몸이 힘든 게 아니라 정신이 힘들어요.
지난 일주일동안 인생을 가를 수 있는 선택 두가지를 했어요. 절대로 번복할 수 없는 선택이었구요, 책임도 제가 져야 하는 선택이었습니다. 하나는 어제 포스팅한 연애관련 일이고, 또 하나는 직업 선택 관련 일이었습니다. 선배 한 명은 '그거 결정하는 게 뭐가 그렇게 힘드냐, 아니면 아닌거지' 라고 말했지만 결국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과 가기로 한 길에 대한 리스크가 정말로 두려웠습니다. 왜냐하면 이번에는 직관을 따르는 대신 오기를 부렸거든요. 그렇게 오기 부려서 망한 전적이 이미 두번이나 있는데도, 연애고 직업이고 둘 다 오기를 부리고 말았어요. 그러니 불안하지요.
웃을지도 모르겠지만, 전 직관, 소위 말하는 감이라는 것을 믿는 편입니다. 뭔가 결정을 했는데 영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하면 그건 잘못된 선택을 한 거라는 의미거든요. 우유부단하게 되는 것은, 이미 감은 대충 어느정도 생겼는데 포기해야 될 것 못해서 생기는 거라고 봐요. 적어도 제 경우에는 그래요. 어떤 게 저한테 최선인지를 이미 내심 판단은 서 있어요. 하지만 거기에 대해 눈에 보이는 증거가 그렇게 쉽게 나올 리가 있나요. 그러니까 다른 쪽에 대한 미련이 계속 생기는 거죠. 알면서도 결정하지 못하게 하는.
지난 주가 그 우유부단함의 피크였습니다. 저는 한 회사의 최종 면접에 합격을 했고, 계약서에 싸인도 했습니다. (그 과정에도 좀 문제가 있었고 출근날짜 조정이 있어서 스케쥴이 급변경되어야 했던 것도 있었습니다.) 그런데 그날 저는 그 자리에서 여러 조건들을 들으면서 '어, 이건 뭔가 아닌데'라는 느낌을 받았고 결국 몇날 며칠을 속 쓰리게 고민하다가 입사를 포기했습니다. 선배들, 가족들, 친구들까지 죄다 가지말라고 뜯어 말리고, 다른 어떤 조건도 비교 우위가 없었지만 막판까지 고민에 고민을 하게 한 건 그 회사가 하는 일이 제가 하고 싶은 분야라는 것- 딱 하나였습니다. 지금 상황을 보면 입사포기가 전화위복이 되긴 했습니다. 그 회사를 포기하고 다른 업계의 회사에서 잠깐 인턴을 하게 되면서 가고 싶던 회사에서 어제 기술면접을 봤고, 진짜 가까스로 통과해서 최종 면접을 앞두고 있어요. 아마 계약서에 싸인했던 그 회사에 들어갔으면 면접을 다시 볼 기회도 못 얻었겠죠. 물론 최종 면접에서 붙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, 최소한 미련은 생기지 않을 것 같아요. 다만 개인적으로 생소한 분야라 걱정스럽습니다만 최선은 다할 겁니다. 근데 잠깐이지만 인턴을 하고 있는 이 회사에도 미련이 생겨버렸어요. 저 진짜 우유부단하지 않나요. (웃음) 아니, 농담아니고 진짜로. 오히려 적성을 따진다면 이런 일이 저한테는 더 잘 맞거든요.
아무튼 뭐 그렇습니다. 생각해보면 되게 웃겨요. 한 회사에 가기로 했는데, 그 회사 출근날짜를 두고 갑론을박 하다가 날짜 정해진 다음에 입사 포기하고, 입사 포기한다는 의사 밝힌 다음날 딴 회사 인턴알바 제의 들어오고, 그거 수락한지 한시간만에 가고 싶던 회사에서 면접보러 오라는 연락 오고. 그래서 나간지나흘만에 또 다른 회사 최종 면접 준비하느라 일 관두고. 완전 엎치락뒤치락, 일주일 뒤의 스케쥴은 고사하고 바로 한시간 앞의 상황도 예측할 수 없었어요. 뭐 인생 사는 게 다 그렇지 않냐고요? 제가 그렇게 길게 살지 못했지만, 네 그렇죠. 그럴 수도 있겠죠. 그렇지만 저는 그것 때문에 그 동안 나이아가라 폭포에 버금갈 정도로 날뛰는 내적 감정의 변화폭 낙차를 겪었고 그런 널뛰기를 버티는 것만도 벅차서 아무것도 눈에 안 들어왔다는 거죠. 뭐 그래요.
그렇지만 이런 일련의 사건(?)을 겪으면서, 아직 절 버리지 않으신 그분과, 이렇게 마구 흔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편의를 다 봐준 선배들, 친구들에게 정말 감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. 특히 선배들은 후배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한밤중에 일 다 봐주고, 제 편의에 맞게 일정 다 조정해주고, 각종 조언 선물세트를 안겨주셨어요. 친구들은, 앵앵대는 거 들어주느라 고생했지요. 아, 그러고보니 친구들만이 아니라 후배한테도 앵앵댔군요. (그래도 연애 상담은 네가 젤 잘해주니까 그런거니 너무 섭섭해하거나 철없는 선배라고 하지 말아줘-_-;;)
어쨌건 지금은 뭔가 상황 정리가 되어 가는 것 같아 그 동안 뭘 했는지 한번 되돌아봤습니다. 언젠가 나중에 뭘 그까짓걸 가지고 고민했나 싶을 때가 오겠죠. 아니, 꼭 그런 날이 와야 합니다. 그리고 그때는 저도 좀 덜 흔들리고 중심을 잡고 서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네요.